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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은 좋은 집에 살면 안 되는가

시각장애인의 독립보행을 가로막는 아파트

에이블뉴스, 기사작성일 : 2016-04-29 15:39:05

어떤 집이 좋은 집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전망 좋은 집처럼 앞에 수식어가 붙으면 달라진다. 살기 좋은 집, 교통 좋은 집, 밥맛 좋은 집, 경치 좋은 집, 학군 좋은 집 등등. 마당에 잔디가 있는 집이라든가, 벽난로가 있는 집이라던가, 다락방에 누워서 밤하늘의 별을 볼 수 있는 집 등 어린 시절의 로망 같은 집.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집은 앞에 이런저런 수식어가 붙는 그런 집은 아니다. 부산과 서울의 부동산 시세는 비교도 안 되게 차이가 나겠지만 부산의 도심에서 99m2(제곱미터, 약30평) 이상 신축이면 제법 비싼 아파트다.
 
대연힐스테이트푸르지오아파트 정문. ⓒ이복남 에이블포토로 보기 대연힐스테이트푸르지오아파트 정문. ⓒ이복남
그런 아파트의 내부야 그렇다 치고 대체로 주변경관 즉 공유면적이 넓다. 산책로도 있고 동산도 있고 연못도 있고 어린이 놀이터도 있어 작은 공원 같다. 어떤 아파트는 아주 넓은 곳도 있다. 그래서 일부러 그런 곳을 택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정연길(48세) 씨는 시각장애 1급이다. 아내와 세 자녀가 있다. 그동안 열심히 일을 해서 변두리에 있던 사업장(지압원)을 도심으로 옮겼다. 사업장과 가깝고 아이들의 학업문제 등을 고려하여 집도 이사를 했는데 아내와 아이들은 전에 살던 아파트 보다는 좀 더 크고 쾌적한 곳을 원했다.

그래서 고른 곳이 ‘대연힐스테이트푸르지오’ 아파트였다. 아내와 아이들은 다른 동을 원했지만 막상 그가 둘러보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정문에서 들어가면 바로 앞에 103동이 있었던 것이다. 다른 동은 그가 찾아 가기가 너무 불편 할 것 같았다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작년 가을에 이사를 왔는데 몇 달을 살아 보니 시각장애인이 혼자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동네였다. 대부분은 아내가 동행을 하지만 아내 없이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공동주택에서 점자블록은 권장사항.  ⓒ장애인등편의법 에이블포토로 보기 공동주택에서 점자블록은 권장사항. ⓒ장애인등편의법
정연길 씨는 흰지팡이만 있으면 혼자서 독립보행이 가능한 시각장애인이다. 그래서 가족들의 부담을 조금이나마 덜어 주고자 노력해 보았지만 그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는 혼자 다닐 수 있는 점자블록이 하나도 없어서 여러 차례 낙상 사고를 겪는 등 그간의 고충이 말이 아니었다. 하는 수 없이 관리사무소에 문의를 했더니 법대로 했다고 하더란다.

화가 난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법대로 했다고 하던데 법에 어떻게 되어 있는 지 좀 봐 주세요.”

필자도 「장애인등편의법」에 유도블록이 있는 줄만 알았다. 그래서 법 조항을 다시 찾아보았더니……. 맙소사! 공동주택의 점자블록은 권장사항이 아닌가.

「장애인·노인·임산부 등의 편의증진보장에 관한 법률 시행령」[시행 2012.8.24.]
[별표 2] 대상시설별 편의시설의 종류 및 설치기준(제4조관련)
4. 공동주택
가. 일반사항
(8) 점자블록 : 시각장애인을 위한 장애인전용주택의 주출입구와 도로 또는 교통시설을 연결하는 보도에는 점자블록을 설치할 수 있다.
나. 대상시설별로 설치하여야 하는 편의시설의 종류
점자블록 : 권장


아파트에서 주출입구 및 접근로 등의 매개시설은 의무사항이고 점자블록은 안내시설로서 권장사항이었던 것이다.

그에게 권장사항이라고 얘기 했더니 그럴 리가 없다면서 다시 한 번 확인해 달라고 해서 보건복지부(장애인권익지원과)에 전화를 했다. 자기들도 노력하고 있지만 권장사항이라 어쩔 수가 없다는 말만 들어야 했다.
 
보건복지부의 답변.  ⓒ정연길 에이블포토로 보기 보건복지부의 답변. ⓒ정연길
그는 왜 권장사항인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다른 동네에 사는 친구 A 씨는 아침에 일어나면 아내가 아침을 하는 동안 혼자서 흰지팡이를 짚고 점자블록을 따라서 동네 한 바퀴를 돈다고 했다.

“그 아파트는 되는데 왜 우리 아파트는 안 되는 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는 너무 화가 난다며 본인이 직접 확인을 해 보겠다며 신문고에 올렸다. 그리고 실망이랄 것도 없는 답변을 받았다. 답변을 좀 보자고 했다. “원장님 말씀대로지요.”

보건복지부에서도 공동주택에 점자블록은 권장사항이지만 ‘우리 부는 장애인 등 시설이용약자의 편의를 위해서 권장사항인 편의시설의 경우에도 설치될 수 있도록 적극 권고하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법대로 했다는 ‘대연힐스테이트푸르지오’아파트는 2,300세대인데 대우건설과 현대건설에서 지었다고 했다. 그래서 필자가 찾아보았더니 시행사가 부산도시공사였다. 부산도시공사라면 공기업이 아닌가. 요즘에는 대부분의 아파트가 시각장애인도 혼자 다닐 수 있도록 점자블록이 설치되어 있는데 하필 공기업이 운영하는 ‘대연힐스테이트푸르지오’아파트에 점자블록이 없어서 이런 낭패를 당하다니…….

명색이 장애인복지 일을 한다는 필자도 미안한 일이지만 그동안 편의시설 연대나 시각장애인 단체들은 뭘 하고 있었단 말인가. 그의 아파트를 한 번 가보기로 했다.

정연길 씨가 사는 ‘대연힐스테이트푸르지오’아파트는 부산 남구 대연혁신지구로 경성대학교를 지나서 옛 부산남부경찰서 맞은편인데, 간선도로에서도 한참이나 들어간 곳에 있었다.

아파트 입구에 양방향으로 차량이 드나들 수 있는 커다란 대문이 있었다. 대문 앞에 횡단보도가 있고 그 횡단보도는 양쪽 모두 아파트 가장자리의 산책로 그리고 아파트 안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런데 횡단보도는 물론이고 아파트의 가장자리로 가는 산책로나 안길 등 그 어디에도 유도블록은 없었다.
 
상가의 유도블록을 가리키는 정연길 씨.  ⓒ이복남 에이블포토로 보기 상가의 유도블록을 가리키는 정연길 씨. ⓒ이복남
그런데 정연길 씨가 손을 들어 가리키는 저 쪽(?)은 상가인데 유도블록이 있단다. 왜 어째서? “많이 사 먹으라고 그런 모양이지요.” 그는 볼 멘 소리를 했다. 상가는 생활시설이라서 유도블록이 의무사항일까.

103동 정연길 씨의 집으로 가는 길은 특이했다. 유도블록도 없는 길을 따라가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을 올라가서는 일단 내려야 했다. 옆에는 계단이 있었고, 벽에는 ‘부딪힘 주의’라는 표시판이 있었지만 시각장애인에게 무슨 소용이랴. 그리고는 앞으로 쭉 가서 왼쪽으로 기둥을 돌고 또 왼쪽으로 돌아서 아파트 입구로 들어갔다. 그는 아내 없이 혼자 가다가 기둥에 부딪히거나 넘어진 적도 있단다.

점자블록은 점형(위치표시용)과 선형(방향표시용)이 있는데 정연길 씨가 사는 아파트에 선형은 어디에도 없었으나 엘리베이터 입구나 계단아래 등 몇 군데에 점형은 있었다.

그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가 봤다.

“마누라와 아이들이 나가고 혼자 있으면 통닭 한 마리도 못 시켜 먹습니다.”

요즘 새로 나온 비싼(?) 아파트는 대부분이 모든 것이 터치식이었다. 문도 열 수가 없고 불도 켤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점자를 붙여 보기도 했지만 잘 안 되는 것 같아서 다시 떼어 버렸단다. 아내 대신 쓰레기를 버려주고 싶지만 혼자서는 쓰레기 버리는 곳을 찾아갈 수도 없단다.

“외부에 점자블록이 설치되고 나면 집안에도 버튼식으로 바꿀 생각입니다.”

최근 사물인터넷 기술이 뜨고 있다. 스마트폰에서 앱을 받아서 텔레비전, 세탁기, 냉장고, 전기밥솥 등을 원격으로 제어할 수 있다는데 기술적인 것은 알아보면 가능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상가 앞에 설치 된 점자블록.  ⓒ이복남  에이블포토로 보기 상가 앞에 설치 된 점자블록. ⓒ이복남
문제는 점자블록인데 ‘대연힐스테이트푸르지오’ 같은 공동주택에도 점자블록이 설치되려면 권장사항이 의무사항으로 변경되어야 할 테니 법을 고쳐야 한다.

장애의 벽을 제거해야 한다는 배리어프리에서 모든 사람을 위한 보편적인 유니버설디자인이 나오는 판에 우리는 아직도 점자블록의 설치를 두고 권장인지 의무인지를 따지고 있어야 하나싶어 서글프기도 하다.

아파트에는 시각장애인 뿐 아니라 지체장애인도 있고 노인도 있고 유모차를 미는 엄마들도 있다. 흰지팡이 또는 스마트폰에만 감지되는 투명한 점자블록은 과연 없는 것인지, 유니버설디자인과 배리어프리의 몫일 것 같다.

기우(杞憂)
문득 하늘이 무너질까 걱정이다. 설마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일은 없겠지만 연일 지구촌에서는 지진을 비롯하여 해일 홍수 태풍 등 천재지변이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전기로 작동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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